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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의 초점

Korean February 6, 2019

문득 작가 프로필 사진을 고르기 위해서 갤러리를 훑는 도중 느낀 게 있다면, 어떤 사진은 내 모습이 잘 나와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있고, 잘 나오지 않았는데 퍽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있다. 사실 이것을 오늘 처음 와닿은 건 아닌 게 11학년 때 당시 절친이 찍어준 사진을 지우지 못하고 사진첩에 남겨둘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은 학교 바자회 같은 행사였어서 하루종일 동아리 부스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는데, 몇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몰골이 그렇게 엉망진창일 수가 없었다. 머리는 산발이고 화장은 거의 지워지고… 여하튼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 엉망인 상태로 학교 육상부 트랙에서 노을을 등지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사진첩을 정리할 때 그 사진을 계속 지울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돌아가 봐도, 그 사진은 남겨두었다. 꽤나 못 나온 사진인데도 난 잊을만하면 계속 그 사진으로 돌아가 그때의 시간을 계속 곱씹곤 했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결국 사진의 퀄리티와 선호도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어렵사리 깨달았다. 그렇게 느낀 사진은 단 둘이다. 나머지 하나는 고등학교 때 서울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회를 보러갔을 때 전시장 앞에서 엄마가 찍어준 사진이다. 그날이 왜 그렇게 기억에 남았는지는 지금도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때 그 동네 특유의 풀냄새가 좋아서, 7월 중순의 햇볕이 좋아서였는지도 몰랐다. 숨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보이는 풀꽃이 좋아서, 그늘 아래 한 숨 돌리는 게 좋아서. 전시장에는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건 천장의 수조 아래 누워서 물의 무늬를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었고 그대로 물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난 어쩐지 손을 뻗어서 물을 만져보고 싶었다. 이대로 가라앉아 눈을 감아도 마냥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기억에 무겁게 남았다. 이후에 모르는 동네의 언덕을 걷고 생소한 책방을 발견하게 되는 그 하루가 일상에 물결을 일었던 것이다. 기억이 찾아드는 날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고 그때 생각했다.

어떨 때는 기억에 남기고 싶어도 당최 남겨지질 않았다. 사진이란 당시의 순간을 시각적으로 기록하는 것인데, 사진을 몇 장이고 찍어도 그날의 기억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고 싶어도 단순히 사진을 찍은 그 순간만 기억하고 그날의 전체적인 인상과 느낌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을 하고 싶어서 기록을 남긴 것이 오히려 그 순간만 잔뜩 부각시켜버린 것이다. 어쩌면 중요했을지도 다른 모르는 요소들은 잠식시킨 채. 난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고 또 찍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 사진첩에는 언제나 사진이 많다. 기억하는 순간들은 많은데, 마음에 남는 순간은 손에 꼽힌다. 요컨대, 기억하고 싶은 것과 기억에 남는 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난 어릴 적 엄마가 만든 케이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맛은 어땠는지 기억하고 싶어하지만 문득 생각나는 건 케이크를 만드는 엄마의 모습이었으니까.

사진 한 장 없어도 계속 기억에 남는 것들도 있다. 나는 유독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쓴다. 봄날의 로즈에서도 로즈와 쥬드는 기억을 가지고 내기를 했고 내 온 마음을 담아서에서는 기억을 잊고 싶은 남자와 기억하고 싶어하는 여자의 정서적 교류에 대한 것이니까. 나는 그렇게 계속 머무는 기억에 대해 쓰고 싶었다. 사진 하나 없어도 기억에 영화마냥 재생될 그런 빛바래지 않는 기억 말이다. 나한테는 어떠한 기억이 중요했고 그 기억을 지키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었으니까, 가 내 얼마 전까지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는 눈이 많이 왔다. 눈이 그렇게 많이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사진에 담고 싶었는데 생각하는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그만두었다. 어차피 머물 기억이라면 굳이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굳이 못 잊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그 기억에게 묻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난 그날 사진을 남겨두지 않아서 내심 안도했다. 기록의 부재에 기꺼이, 몇 번이고 마음을 놓았다.

눈사람

Korean June 24, 2018

눈사람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만 오면 그녀는 그때를 생각했다. 시간이 덧없이 흘러 이제는 까마득히 남은 기억뿐인데도, 그녀는 그 조각들을 짚으면 그때를 생각했다. 이제는 그 어느 겨울도 그때와 같지 않다. 지금은 그저 메마른 황무지에 눈덩이가 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겨울은 달랐다. 고즈넉한 12월의 설원 저편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 치는 것을 생각했다. 귓가를 찌르는 정적 사이를 얄팍하게 파고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가 어떻게 돌아보았더라?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던가, 아니면 그저 설원 저편에서 그녀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던가. 그는 그녀를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 것도, 아무도 없는 설원을 그리 사무치게도 보았던 그의 시선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나. 이제는 모든 것이 부질없었음에도 그녀는 아스라이 남은 눈꽃 하나하나를 되짚었다. 발이 푹푹 담기는 눈에도 자그마한 불꽃이 있었다. 눈 속에 숨은 그 온기를 찾듯 그들은 눈을 두 손으로 끌어모았다. 말없이 눈을 빚는 그 손은 장갑을 끼지 않아 빨갛게 얼어있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눈사람의 몸통을 토닥이는 그는 역시나 발개진 콧잔등을 찡그렸었다. 언 손을 이따금 주머니 속에 찔러넣으며 그는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고 그녀를 달랬었다. 그녀는 그 거짓말에 까무룩 속아 고개를 끄덕였더랬지. 그러니 그의 시선이 자꾸 그녀의 궤도를 벗어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시선의 꽁무니만 계속 쫓았다. 눈사람이 있던 자리에 모닥불을 피워, 그 자리가 까맣게 그을릴 때까지, 그 시선의 끝에만 다다를 수 있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도, 역에서 작별 인사를 나눌 때도, 그 시선은 언제나 너무 멀리 머물러 있었다. 세월이 훨 흐르고 잠들지 못하는 밤이 찾아들 적엔 그녀는 그을음마냥 그가 마음에 까맣게 번지면 그저 그 눈길을 생각했다. 그녀에 머물지 않던 그것을.

(단편) 밤

Korean March 27, 2017

지평선을 뒤덮던 햇살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황혼 속 빛의 시작과 끝을 구별하지조차 못하게 될 때, 나그네는 파도가 머물던 곳을 지나간다. 바다는 해가 지고 떠도 계속 말을 내뱉는마냥 울렁였고 발 아래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에는 그리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다 속 손가락 사이를 가르는 얼룩진 물결에는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그네의 발길이 지나는 모든 길에는 마음이 흔들린 흔적이 있다. 밤이 지나고 보낼 연서를 마음에 꼭 담아둔 채, 그는 발길을 바삐 한다. 반딧불의 향연은 그가 걷는 길을 비추고 그 흔들리는 불빛조차 그의 마음 한 가닥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연서는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울렁이는 마음을 끝내 감추고 숨겨, 태가 나지 않을 때까지 삼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생각 한 켠에 잔뜩 요동치고 있는 그리움이 그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연서를 쓸 적을 생각했다. 연서를 쓴 종이를 고이 접어 봉투 입구에 예쁜 토끼풀 한 가닥을 묶어놓았던 그 손길을. 그도 안다. 사실 그 연서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음을. 마음을 삼키고 숨겨, 옮겨 적으려는 순간 그 마음은 두려워 꽁꽁 숨어버렸다. 그녀가 봉투를 열어 연서를 꺼내보아도 연서는 단어 하나, 또 마음 하나조차 속삭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그네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종소리 나는 아침이 와서, 그가 그곳에 다다랐을 때, 이것을 핑계로 닿을 수만 있다면, 그의 비겁한 마음도 조금은 괜찮아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