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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순간

Korean June 14, 2020

요즘 글 자체를 잘 안 쓰고 있기는 하다만 유독 한국어로 글 쓰는 것을 계속 미뤄뒀었다. 물론 과제 기간이라 바쁘고 시국이 시국인지라 마냥 산만해져 머리속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글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냥 쓸 수가 없었다. 요즘은 소설 쓰는 일이 버겁다는 것을 꽤나 절절하게 실감하게 됐다. 소재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내 온 마음을 담아서> 출간 이후로 구상해낸 소재는 대여섯이 넘는다. 문제는 나다. 나는 전부터 만족할만한 소설 하나를 쓰면 그 이후로 슬럼프가 꽤 길게 오는 편인데, 중학교 때 쓴 <봄날의 로즈> 이후로도 퍽 마음에 들 만한 소설을 쓸 때까지 장장 1-2년이 걸렸다. 마치 한 사람당 쓸 수 있는 감정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번 글에 감정과 열정 같은 걸 쏟아내고 나면 나는 한동안은 비슷하게라도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글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다. 나는 능력 (겸 영감)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글을 쓰고자 하는 모든 의지가 상실된다. 굳이 쓰고자 하면 아마 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 글을 쓰는 순간부터 내 글은 100%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내 언어만의 가치를 내 해이해진 마음이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맞이하는 내 언어와 마음은 완벽해야 한다. 둘이 같은 곳에 존재해야 나는 글을 쓸 수 있다. 몇번의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물론 그렇다고 시도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쓰다만 소설이 넘쳐난다. <내 온 마음을 담아서> 이후에 끄적였던 원고들이 미완성인 채 내 컴퓨터 속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플롯을 짜고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계획에 충실할 수 있는 작가들이 부럽다고 늘 생각해왔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은 내 심리 상태에 너무 좌지우지 된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무언가가 붙들어 주었으면 했었다.

생각해 보면 내 글에는 늘 어떤 기원이 있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더듬어 뻗어가면 보이는, 다듬어지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인 형상이. 나는 그것을 모호한 글로 포장하여 소설이라는 프레임 속에 가둔 것이다. 나만의 시선을 두른 그것을 사람들은 뮤즈라고 부른다. 소설가로서 나는 항상 뮤즈가 있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져 그것이 살아나길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그 결과로 그의 절실함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조각에 숨을 불여넣고, 조각에 불과했던 그것은 갈라테이아가 되어 그와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물론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 창조물에 담는 것이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창조물과 사랑에 빠진 것이기에 행위로만 두고 보면 둘은 상반되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피그말리온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예술에 미의 결정체를 형상화한 것 아닌가? 자신이 정의하는 미를 실체화시켰기에 매료가 가능했던 것이다. 머리속에만 뭉뚱그려 있던 어떤 것을 눈앞에 실존시키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감정의 방향에 힘을 불여넣어 준 셈이다. 갈라테이아는 미의 결정체로서 그의 뮤즈지만, 그의 진정한 뮤즈는 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물질적인 무언가가 되어 그가 소유할 수 있는 누군가가 되었으니.

내 뮤즈는 이처럼 사람인 적도 있었고, 추상적인 어떤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때마다 달랐다. 중학교 때 처음 들었던 현악 오케스트라가 인상적이어서 클래식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처음으로 연주했던 곡이, 다른 현이 합을 맞추어 한치의 오차 없는 화음을 자아내는 게 두고두고 생각나서 그것을 글로 형상을 만들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봄날의 로즈>를 통해서 오케스트라와 여가수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내 온 마음을 담아서>에도 뮤즈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상실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그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고 있는 내 자신이 뮤즈가 된 것이다. 나도 성경과 환처럼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듯 관계가 위태로웠던 친구가 있었고 내 ‘문학적’ 고뇌는 어떻게 보면 그 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쓴 글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쓸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을, 그 사람들을 너무 사랑했고 글은 피그말리온의 조각처럼 내 감정을 형상화하는 방식이었다. 글을 쓰면 응어리졌던 감정이 해소된 느낌이고, 굳이 내가 짊어지지 않아도 다른 곳에 고이 저장해두는 느낌이다. 내 소설은 환의 ‘대답 받을 수 없는 편지’고, 성경과 환이 주고받는 어떤 것은 내 일방향의 글을 해소하고자 하는 내 노력이었다.

그러니까 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확고한 동기나 계기가 있던 게 아니었다. 집필에 대한 활활 타오르는 열정도 아니었고 글로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사념감도 아니었다. 소설은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다. 모든 게 빠르게 바뀌어 가고 변하는 세상에서 영원에 가까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라지지 않게 할 방법이다. 시간이 지나면 무의미해질 모든 만물에서 내가 끝까지 아낄 수 있게 되는 것들이다. 나는 글을 사랑하지만 내가 글을 쓰게 하는 것들은 이렇게 개인적이고 작다. 나는 이런 사소한 것들에 붙들린다. 멀리서 보면 의미가 있는지도 잘 모를 것 같은, 개인의 것.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갑자기 생기는 것들이다. 내 뮤즈가 그렇다.

내 사랑의 기원은 너무나도 잘 사그라들고 아스라져서 내 글의 존재도 예측 불허가 된 것이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은 게 없어서 그런 걸까? 이제 내 뮤즈는 실존하지 않고 내 글에는 방향이 없다.

나는 그래서 만나게 되는 작가들에게 늘 묻는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글을 왜 쓰세요? 이건 정말 간단하고, 어떻게 보면 너무 기본적이어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글을 쓸 때 정확한 메커니즘이 있는 게 아니기에 돌아오는 대답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써야되니까, 쓸 수밖에 없으니까. 이유가 어딨어요, 쓰게 되니까 쓰는 거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글로 적어 사념으로만 존재했던 것에 생명을 불여넣고 싶으니까. 피그말리온처럼.

어떻게 보면 답은 이것보다 명쾌할 수가 없다.

요컨대 글은 그냥 내 일부인 것이다. 뮤즈가 있던 없던 글이 없는 삶은 결단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해답을 찾기 위해 쓰고, 기억을 하고 싶거나 잊고 싶어, 또는 상실을 마주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나는 지금 오랫동안 아꼈던 뮤즈를 잃어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 상실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건 알고 있다. 뮤즈는 글을 쓰게 해주는 동기고 뮤즈가 없을 때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내게 다시금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때가 오면 쓰면 되는 것이다.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로서의 내 어떤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내 일상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이를테면 나는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아니면 손에 잡히는 게 없을 때 손가락 살을 뜯는 버릇이 있는데, 누군가 내 손을 내려다 보며 자신은 비슷한 버릇을 고치려고 칼로 한번 손을 그은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 이후로 손을 건들려고 하면 그때의 통증이 계속 생각나 결국에는 버릇을 고쳤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정말 좋은 소재라는 것이었다. 인물의 특성이 꽤나 강하게 드러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것을 소설에 넣고 싶다는 생각도 일순 스쳤다. 그러니 충분히 쓰고, 기록하며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긴다면 나는 주저없이 또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그때를 위한 추진력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 아직 병아리…지만 작가다. 무언가에 정신없이 꽂혀 몇년간 그것에 관해서만 쓸 수도 있고, 아예 글을 쓰지 않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늘 작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