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로즈 (미완성) 속편 — 6

Korean October 12, 2018

오늘 이력서 정리 좀 하려고 쓴 작품들을 쭉 보고 있었는데, 마침 봄날의 로즈 속편을 쓰다 만 것이 기억이 나서 조금 읽어봤다. 봄날의 로즈는 정말 재밌게 쓴 첫 작이라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지만 중학교 시절 쓴 것으로 부끄러운 점이 정말 많다. 그래서 2-3년 뒤에 쓴 이 속편도 사실 미완성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챕터는 마음에 들어서, 추억을 곱씹는 겸 한 번 올리기로 한다. (사실 요즘 슬럼프라서 글이 안 써지는 바람에 옛날 글 재탕하는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


이리는 스노우 돔 연습실이 아닌 본인의 집으로 로즈를 데리고 갔다. 왜 굳이 연습실이 아닌 그의 집이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음악하는 사람이니 예민할 수도 있겠다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어가는 내내 로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건 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아리아가 걸어나와 잠시 로즈와 아이컨택을 해 인사를 한 것 말고는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해야 되지, 싶어서 로즈는 그 싱숭생숭한 기분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그것은 모래에 깊게 남은 발자국과도 같았고 여름날 사 먹었던 얼음과자마냥 차가워 얼얼해진 입 속처럼, 그 감촉은 로즈를 오래 어루만졌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촉감이 남아, 마음을 파고들어 온 생각을 사로잡았다. 이리를 보면 한껏 들뜨던 마음이 어느새 눈 앞까지 찾아온 현실과 마주치면 차갑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녀를 붙드는 작은 손들 때문에 차마 앞으로 내딛지도 못했다. 그 가시 박힌 느낌에 로즈는 발만 동동 구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리를 따라 그의 서재에 들어가서도 차마 건반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주저했다.

“뭐야?” 이리가 갑자기 말했다. 로즈는 고개를 들었다.

“병든 닭마냥 비실비실, 너 오늘따라 왜 그래?” 그가 안경을 내려놓고 인상을 쓰며 말을 이어갔다.

“뭐가요,” 로즈는 퉁명스레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그렇게 이리 끙끙, 저리 끙끙,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끙끙대지 말고, 하고 싶으면 속 시원히 하라고,” 이리가 말했다.

“무슨…”

“나한테 배우고 싶다며? 근데 이게 무슨 짓이지?” 이리가 스코어를 그의 책상에 탁, 하고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하루종일 로즈 씨가 신경 쓰여서 일이 안돼. 어제도 그렇고, 오밤중에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오늘도 연습실 왔다가 그냥 갔다며? 그러고선 윗층에서 정신 사납게 나돌질 않나. 메인 연습실에서 다 보이는 거 알아? 나 잡아가세요, 하늘이 두 쪽 나도 난 몰라요, 하는 눈으로 연습실만 빼꼼히 쳐다보고 돌아가는데 내가 어떻게 일이 손에 잡혀? 나한테 시위해? 내가 요즘 조금 바빠서 네가 말한대로 네 수업 못해줬다고 뭐라고 하는 거야?”

“어…” 어지간히 신경질이 났는지 속사포로 쏘아붙이는 이리에 다소 놀란 로즈는 한 템포 놓쳤다. 그렇게 티났나? 로즈는 그간 자신의 행동을 곱씹으며 살짝 민망해졌다. 풀 죽었다고 티내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생각했다. 그렇지만 말은 할 수 없었다. ‘직접 말해주면 안돼’, 라고 쥬드가 명백히 지시했는데, 이제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고, 며칠밖에 안됐는데 룰을 깨서 내기에서 지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안돼, 지금은-

“피아노 쳐주세요,” 로즈가 대뜸 말했다. 자신이 예상하던 질문의 대답이 아니자 이리는 심기가 불편했는데 반박하려고 했으나 로즈가 선수를 쳤다. “제가 저번에 쳤던 곡이요, 그거 선생님이 편곡해서 들려주세요. 전부터 계속 부탁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너-어무 바쁘셔서 그럴 기회를 놓쳤네요.”

“너 하고 싶은 말부터-”

“네? 제발요,” 로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리는 한숨을 쉬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로즈는 재빨리 피아노에서 일어났다. 이리는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녀를 잠시 흘겨보더니 피아노 건반 위에 그의 긴 손가락을 얹었다. 그래, 로즈가 생각했다. 그가 곡을 모르더라도 이렇게라면 된 거야, 이렇게라면 나도 이제는 만족할 수 있어-

“넌 그저 주선율에 대선율을 얹는 식으로 연주를 했었지,” 이리가 말했다.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에게 보여줄 때는 괜히 양심에 걸려 곡을 이곳저곳 바꿔가며 연주를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나온 것이 제일 간단한 방식이었다. 여기저기 꾸밈음을 더 넣어서 곡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끝없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주선율을 치장하는 대선율-

“나라면 이렇게 할 거야,” 이리가 그녀를 보며 한 마디 하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로즈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즈의 레퀴엠을 모르는 이곳의 그가, 오 년전 그가 쳤던 연주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이다. 역시 본인이 작곡한 것이라 이건가, 로즈가 쓴 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똑같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예상 외로 많이 흡사했기 때문에 로즈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녀가 이 내기에서 지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이리는 여전히 음악 속에서 살 것이다. 그녀 때문에 절망에 허우적대는 것보다는 음악 속에서 영원토록 숨 쉬는 것이, 더욱 이리다웠다.

“게다가 너,” 이리가 입술을 비틀며 연주를 멈추었다. 그는 로즈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때 말은 안 했는데, 너가 친 거, 음이 이상하잖아! 화음 몰라? 여기에 이 음이 왜 들어가는데?”

그는 건반 두 개를 동시에 치며 말했다. 로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의 불 타오르는 눈길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음이 엉키다가 이내 서로를 밀어내듯 괴상한 소리가 났다. “너 대체 오케스트라에서 그 틀린 음은 어떻게 찾아낸 거야? 이거 순전히 운 아니야?”

“거 실수 조금 할 수 있죠, 사람인데,” 로즈가 중얼거렸다.

“베토벤도 사람이었고 모짜르트도 사람이었어,” 이리가 반박했다. “그 사람들이 이런 간단한 음 가지고 실수를 했을 것 같아? 아니야, 그건 아니지. 그 사람들은 시 플랫, 미 샵, 이런 건 듣자마자 딱딱 알았다고- 퍼즐 끼워맞추는 것보다 쉬운걸 왜 넌 못 해?”

“그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로즈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이것은 핑계임을 알았기에 차라리 그가 못 듣고 넘어갔으면 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도 트집을 잡겠지-

“음이 튀어, 넌. 나한테 작곡, 피아노, 편곡, 뭘 배우고 싶은진 몰라도 저 곡, 일단 주선율에 대선율은 어찌어찌해서 끼워넣은 것 같은데, 음이 안 맞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어. 방금 들었지? 안 맞는 음끼리 억지로 붙이면 서로 튕겨낸다는 것. 넌 그걸 주선율에 대선율이니까 괜찮겠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나 본데, 아마 하이든이나 쇼팽같은 거장들이 무덤에서 번쩍 깰지도 몰라. 뼈밖에 안 남은 몸으로 지팡이 들고 널 찾아오겠지. 넌 오늘 자기 전에 쇼팽을 비롯해서 온 음악가한테 사과나 하고 자. 애초에 화음, 음계도 모르는 애가 뭘 배우겠다는 건지,” 이리가 말했다.

로즈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온통 맞는 말만 해대니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로즈는 그저 얼굴만 잔뜩 찡그리고는 수긍했다.

“선율 자체는 괜찮은데…너 어디서 베낀 거 아니야? 어디서 좋은 음악 듣고 아, 이거 좋다, 하고는 슬쩍 가져오고 뻔뻔하게 자기가 작곡한 거라고 내민 것 아니냐고. 음도 못 맞추는 애가 이 정도의 선율을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이리가 비꼬듯 한 쪽 입술을 틀어올리며 말했다.

로즈는 이 말에 더더욱 입을 내밀었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는 그저 입에 바람만 넣다 뺐다, 반복하기만 했다. 내가 뮤즈였기도 하고 일부는 내가 아이디어를 준 것이니 내 것이 아니라고는 발뺌할 수 없겠지, 라며 속으로 잔뜩 합리화를 하기도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리는 혀를 차며 인상을 구기더니 이내 건반 위로 다시 손가락을 올려 음계를 좌르르 치며 화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단조로웠던 곡이 순식간에 화려하고도 애절하게 변한 것을 듣자 로즈는 놀란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피아니스트는 다르다 이건가, 로즈가 생각했다. 음 하나를 듣고도 무슨 음과 화음을 자아내고, 어느 것이 완전히 어긋나는지 척척 아는- “음계는 중요해. 네가 화음을 모르는 이상 넌 제대로 된 작곡을 할 수 없어. 언제까지 주선율에 대선율만 얹혀서 작곡할 거야? 그런 건 가볍게 듣는 곡만을 위한 거야. 네가 깊이 있는 작품을 작곡하고 싶다면 그 음에 상응하는 다른 음들을 찾아 넣어야 해. 네가 고르는 음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지. 가령…”

이리는 숨을 고르더니 로즈의 레퀴엠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가 쳤던 것과는 살짝 다르게, 다른 음을 화음으로 넣어서- 그리고 그가 눈을 뜨며 건반을 치는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크리센도에서 포르테시모까지, 곡은 조금 더 경쾌하게 변화되어 있었다. 거기가 본 곡에 여러 음을 넣어 스타카토까지, 빠르고 빠르게, 경쾌하고 춤을 추는 것처럼. 왠지 서글프고 절절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던 로즈의 레퀴엠 3악장은 어느새 춤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후반부에는 카덴자를 넣어 여러 음을 끝으로 곡을 마쳤다. 그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여운에 로즈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박수를 쳤다. 이리는 귀찮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건 나 정도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너한테는 바라지도 않아. 먼 훗날에 단말마의 비명마냥 아, 이 음은 이 음과 맞겠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을 정도겠지. 뭐, 음을 대충 엮어서 선율로는 만들 수 있는 것 같으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다만… 악보 볼 줄은 알지?”

“무슨…” 로즈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제껏 스코어나 잔뜩 던져주고 안 돌아가는 머리로 열심히 끄적이라던 사람이 누군데-

로즈의 험악해지는 표정을 지켜보던 이리는 한 쪽 입꼬리를 다시 슥 올리더니 비웃음 쳤다. “농담이야. 로즈 씬 너무 예민한 것 같아. 조크는 조크로 이해했으면 좋겠군.”

“선생님만 하겠어요?” 로즈가 중얼거렸다.

이리는 로즈의 대답을 무시하고 피아노에서 일어서더니 눈빛으로 피아노 쪽으로 가리켰다. “뭐해? 연습 안 해?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소이레에 나와. 나보다 늦으면 넌 바로 아웃이야. 나와서 음계 연습해. 이거, 형편 없어서 원… 음계도 모르는 빠가사리를 제자로 뒀다고 웃음거리가 되겠군. 영원한 에이 마이너 지휘자에게 음계의 ‘음’ 자도 모르는 자칭 작곡가, 피아니스트, 또 소프라노라고 했나? 다재다능도 하셔라. 아주 흥미롭겠어. 기대가 커, 로즈 씨.”

“거짓말 아닌데,” 로즈가 오기에 똘똘 차서 말했다. 같이 협연도 했잖아요, 라는 말이 입술까지 튀어나오려고 했으나 쥬드의 당부가 계속 귓가에 울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을 사실이라 부르지 못하니 속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부글부글 끊는 속을 진정시키려 피아노 앞에 앉아 두 음을 아무렇게나 골라 쳤지만 둘은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거봐, 넌 끝까지 허세라니까.” 이리는 그것을 들으며 빈정댔다.

치, 로즈는 한 마디 내뱉고는 다시 쳐보려고 손을 들었다. 손가락을 건반 위에 내리치려던 찰나 피아노에 기대 지켜보던 이리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었다. 그는 음 두 개를 골라 힘을 주었다. 그의 힘이 실려 로즈의 손가락이 건반을 내리치자 피아노에서는 선명한 화음이 들려왔다. “너는 솔을 치려고 했나본데, 또 틀리고 싶나? 하여간 학습 능력이 없어요.”

로즈는 그가 쳤던 음을 다시 치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선생님 친구 없죠?”

“뭐야?” 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홧김에 말한 건데 이때다 싶어 로즈는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렇잖아요. 맨날 고상한 척, 깐깐한 척. 아니, 척이 아니라 진짜지. 하나의 실수도 용납 못 하는 까탈스러운 완벽주의자. 스톤브릿지에서도 과제 같은 거 있으면 막 다른 사람들한테 뭐라고 지적하고 그랬죠? 그래서 그나마 있었던 사람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교수들한테도 고개 빳빳히 들고 대드니까 밉보이기도 하고. 핀잔 많이 받았죠? 그래도 선생님한테는 주위 시선 따위는 중요치 않으니까 무시하고 다니죠? 그레이스 씨도 성격이 쾌활하시고 시원시원하니까 선생님 그런 성격 버티고 몇 년씩이나 같이 있는 거고요.”

로즈는 실실 웃으며 말하고도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이리를 보며 욕 먹을 것 같아 금세 말을 거두려고 했으나 전혀 변명하지 않는 이리를 보며 더욱 크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아, 맞구나? 선생님 진짜예요? 진짜 친구 없어요? 아, 이럴 줄 알았어. 제가 뭐랬어요. 그레이스 씨 안쓰럽다…”

“그게 지금 너가 상관할 일이야? 넌 네 공부나 제대로 해. 그 실력으로는 곡은커녕 동요도 제대로 작곡할 수 없어,” 이리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로즈는 숨결 아래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리는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주위에 사람은 넘쳐나는데 정작 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되는… 남들이 뭐라고 수근거리던, 욕하던, 언제나 혼자서 짊어질 사람이다. 신경은 쓰이지만, 그 짐을 덜어놓을 수가 없어 억지로 꾸역꾸역 들고 제 길만 가는 고독한 사람. 그래서 언제나 안타까웠는데- “그래도 단원들한테는 살살 해주세요.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해라는 거 모르세요?”

“내가 가르치는 건 나그네가 아닌 음악가야. 너같이 음계도 모르는 덜떨어진 애가 있는가 하면 음악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런 사람들한테 이건 샵입니다, 이건 스포르잔도입니다, 내가 하나하나 알려주면서 해야 하는 건가? 넌 잘 모르나본데, 그 사람들은 프로야. 애초에 내가 그렇게까지 알려줘야 하는 것에 그 사람들은 모욕감을 느껴야 정상인 거라고. 공연, 얼마 안 남았는데 내가 그럼 달래가면서 해야겠어? 그리고 너 전부터 자꾸 내 교육 방식에 뭐라고 토를 다는데, 계속 그러면 너부터 내보낼 수가 있어,” 이리는 로즈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더니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스코어를 펼쳤다.

정말 한 마디도 안 지는군, 로즈가 생각했다. 그녀는 피아노에서 일어나 책상 반대 편에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이리는 언짢은 얼굴로 그녀를 슥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스코어에 집중했다. 그의 스코어에는 이곳저곳 그가 필기한 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의 가지런한 글씨가 모든 구석을 가득히 채워, 그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공부해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로즈는 그것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곡을 흥얼거리자 그가 다시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주었다. 로즈는 다시 입을 내밀며 그가 스코어를 분석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그가 다시 생각난다는 것이 있다는 것마냥 고개를 들었다.

“너, 내가 스톤브릿지에 다닌 건 어떻게 알았지?” 그가 물었다.

에, 로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알면 안되는 거였나? 이리는 공인이니 그의 학벌은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차하면 그레이스가 말해줬다고 할까? 하지만 따지자면 그녀와 그레이스가 말을 튼지는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녀가 자신 없이 어디서 들었다고 대답하려던 찰나 이리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스톤브릿지는 오래 전에 허물어졌어. 네가 소이레에 오기 한참 전… 십 년도 넘은 얘기지.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니니 그레이스가 먼저 얘기했을 리도 없고. 뭐, 됐어. 로즈 씨가 꼭 나한테서 배우고 싶다는 집념으로 내 뒷조사를 잔뜩 했던 말던 난 관심 없어. 내가 관심 있는 건 네 형편 없는 음계야. 그거나 제대로 해,” 이리는 여전히 스코어에 무언가를 휘갈겨쓰며 눈빛으로 짜증스럽게 피아노 쪽을 쳐다봤다. 로즈는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스코어를 분석하는데 집중하고 있어 이미 로즈는 그의 관심 밖인 것 같았다. 일단은 다행인 건가, 로즈가 생각했다.

로즈는 집중하는 이리의 얼굴을 보며 자신이 오래 전에 소이레에 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리는 무엇을 하던 언제나 이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눈에 띄는 표정 변화를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버섯을 썰고 있을 때나, 산책을 나갈 때나, 아주 변함없이 한결같아. 말이 조금 신랄하기는 하지만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단원들을 걱정하는 마음, 음악을 위하는 마음. 때로는 그 진심이 닿지 않아 누군가를 상처 입힐 때도 있었으나 로즈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음악이 곧 자신이기에 그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끌어안았다. 음악은 그런 것이기에, 그는 다른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만 좀 보지? 내 얼굴 뚫어지겠어,” 시선을 느끼고 이리가 로즈의 공상을 깨며 말했다. 로즈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약간 들썩이고 말았다. 그러자 이리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주 침 떨어지겠어.”

로즈는 멋적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냥요. 생각 조금 하고 있어요.”

“별 거 없는 생각 나중에 하고 한가하면 연습이나 해. 연습하라고 데리고 왔더니 망상이나 하고 있고. 아까 나보고 수업 안 해준다고 시위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안 하겠다고 버텨? 그건 내가 못 보지. 빨리 가,” 이리가 피아노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로즈는 퉁명스럽긴 해도 슬쩍 미소를 지으며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피아노 너머로 이리와 눈이 마주치자 로즈는 다시 웃었지만 이리는 이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로즈는 그저 웃기만 하며 다시 로즈의 레퀴엠을 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저 대선율과 주선율의 조합이 아닌, 다른 꾸밈음을 넣어서. 이리가 작곡했던 원곡과 흡사하게. 간혹 음이 나가서 이리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치기만 했다. 즉석으로 단조로운 멜로디로 들리게 하느라 대충 이것저것 넣었지만 이리가 작곡한 원곡만큼은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로즈는 눈을 감고 치기 시작했다.

‘긴장이 되면 눈을 감아,’-

곡이 끝날 때쯤에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것은 다시 돌아가지 못할 시간을 향한 미련이었을까, 가지지 못할 미래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로즈는 심장에 아프게 남아 있는 그 느낌에 조용히 흐느꼈다. 그저 이리가 그녀를 보지 못하게, 피아노 뒤에서 숨죽이며. 남은 날들의 숫자가 새겨져 있는 손바닥에 눈물이 떨어졌다. 한참 동안이나 이리 역시 아무 말이 없어 고개를 들자, 이리는 책상 뒤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피아노 뒤에서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빨개진 두 눈이 그와 마주치자, 그는 뜸을 들이더니 낮고 깊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네 곡을 들으면 어째선가 머리가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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