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지나간 시간의 기록을 보는 건 언제든 재미 있다고 생각한다. 난 예전에 일기를 꽤나 자세하게 썼는데, 누구와 뭘 했고 어딜 갔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세세하게 적곤 했다. 그날 하루 좋아하는 남자애한테서 종이 학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날 과학 보충 수업이 끝나고 먹었던 아이스크림 맛이 어땠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본 강아지가 매우 귀여웠다던지 하는… 하루하루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을 정말 빠짐없이 썼는데, 이건 마치 약간의 강박증과도 같아서, 그 순간을 이루는 작은 디테일이라도 빼놓으면 어쩐지 내내 찝찝한 느낌이다. 예전에 가족끼리 여행을 꽤나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여행을 다니며 있었던 일을 기록하라며 공책 하나를 줬었다. 파란 배경의 스누피 그림이 귀여웠던- 그럴 때면 모든 것을 적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간 곳, 느낀 것 하나하나 모두 적곤 했다. 좋았던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정말 괴롭다.

그러니까 난 순간을 기록하는 게 좋다. 그게 사진을 찍던,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던, 글을 적던, 순간의 반짝임을 기억 속에 담는 게 좋다. 그것이 설령 마냥 말랑말랑하고 예쁜 그림이 아니더라도 연필 꾹꾹 눌러 적는 글이 좋다. 어제의 일들을 잊어, 라고 말하기엔 난 모든 순간의, 실수투성이 헛점 가득한 내가 좋고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는 것이 재미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난 오늘 아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옛 학교를 방문했다. 내가 숨쉬고 매일 뛰어왔던 복도를 거닐며 난 향수에 잠겨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학생들이 오고 간 흔적이 남아 있는 빈 복도는 아주 조용했고, 이야기에는 기억이 실려 구석구석 울려퍼졌다. 너무 궁지에 몰릴 땐 한 구석에서  사탕 하나 손에 쥔 채 숨죽여 울고, 한때 학년 차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학을 (지금의 나로서도 매우 의외지만) 정말 잘했고, 모 도넛 브랜드와 흡사한 교복에 대해 투덜대던 그 시절의 나를 생각했다. 난 그 시절 꼭대기 층에 서서 언젠가는 숨막히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3년 뒤 같은 곳에 다시 서서 나를 마주볼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내 옛날 이야기를 알아볼 누군가가 있었을까.

난 그저 일개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할 수 없다. 내게 모진 말을 내뱉고, 그날의 기분을 잡초마냥 짓밟은 사람이라도 어쩌면 무릇 잊혀질지도 모른다. 난 정말 잡초 같아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말보다, 며칠 전 엄마가 해준 정말 맛있었던 햄과 치즈 토스트가 더 기억에 남는다. 엄마한테 다시 해달라고 해야지, 라는 것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단순한 사람이라서 더더욱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망각이라는 것은 어쩌면 기억의 동반자 같은 것이라, 좋지 못한 꿈을 꿀 때 눈을 감겨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난 오늘 하루의 노을 색깔을 기억할 것이다. 여름 그 중간에서, 남색 끝자락에 햇빛이 따뜻한 선홍빛과 산뜻한 주홍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그 사이로 비행운이 지나가는 것을 두고두고, 달콤한 사탕 같은 것을 입에 오래 오물거리고 있듯 곱씹을지도 모른다. 친구의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와, 열 다섯의 나와 마주했던 자리, 그리고 그 노을. 그 세 가지를 오래오래, 기억하겠지.

오늘 집에 올 때쯤에는 뉘엿 지던 해가 완연히 저물고, 밤을 비추는 빛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있었다. 난 노래를 들으며 그 아래서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발걸음 하나를 가볍게 움직이고, 노랫소리를 읊조리며. 오늘은 그런 하루였다. 기억해 마땅한 하루. 난 기억의 옷깃만 만져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옷깃, 그 자락 하나로 충분하다. 전체를 볼 방법이 없으니, 늘 전체의 일부만 어렴풋이 볼뿐이다. 그 옷깃에 스며든 쪽빛, 그 기억 사이로. 어차피 평생 진리의 조각만 찾아다니는 삶이니,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시간이 흐른 언젠간, 이 순간조차 나의 옛날 이야기가 되어 난 이 글을 읽으며, 이때를 회상할 것이다.

오늘의 추천 곡: 아이유 (원곡 이상은)- 비밀의 화원


추신. 요즘 본업인 소설보다 수필 같은 글을 조금 더 많이 적는 것 같아서 약간의 위기감도 들기 시작했다. 약간 생각의 흐름 같은 글이랄까. 시작해놓은 장편 소설은 4부만 남겨둔 채 끝내지 못한 상태니까… 하지만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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