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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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스쳐가는 낭만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낭만이라 하면 뭔가 뜨겁고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릴 법한데 (그렇게 따지자면 난 인생에 전혀 낭만의 순간이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다), 낭만은 그저 기억을 두고두고 달게 만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창할 필요 없이, 그 순간 시간을 잃어버린다면, 어떠한 마음에 빠져 밤새 뒤척이거나 아무 이유 없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낭만이 아닐까 싶다. 흑백인 시간에 색깔을 덧입혀 주는 것. 어쩌면 보라색, 연분홍, 부드러운 남색일지도 모르는 기억이, 낭만이 스며든 순간이다.

최근에 단편을 쓸 때 이군을 모티브로 삼았었는데, 오늘은 그 얘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이군은 내 기억 속의 아픈 구석이다. 아프고, 예쁘고, 기분 좋은 말랑말랑한 구석. 이군은 중학교 때 만난 친구다. 우리는 친구라기엔 조금 애매한 거의 펜팔 수준의 사이였는데, 실제로 어떻게 만났는지조차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수준이었고, 그것이 빨리 친해지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군은 뭔가, 말투가 사근사근하다. 말을 정말 뭐랄까, 시적으로 예쁘게 한다. 또래 남자애들 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범생에 쓴소리 못하는 바른 학생인데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만나면 자기 얘기를 하기보단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조곤조곤 맞장구쳐줄 것 같은 이미지. 맞춤법도 철저하고 (이것이 은근 크게 신경쓰이는 요소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또래보다 너무 빨리 철들어 버렸다- 가 그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음… 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에 대해서 조금 말해두자면 난 그 당시 조금 예민한 아이였다. 이리저리 튀어다녀 여기저기 멍이 들고, 툭 건들면 울 듯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이. 딱히 뭐에 화가 나 있지도 않았고, 누가 모진 말을 해 축 쳐져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시종일관 기운이 없고 저기압이었다. 누구한테 털어놓지도 못하고, 털어놓을 기회가 오면 입을 꾹 다물고 모르쇠 해버리는, 그런 답답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안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그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 조금 날카로워져 있었던 시기였다. 화를 내면 더욱 초라하고 비참해져서 우울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갈 당시에, 난 내 상황에 대해서 별로 설명을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설명할 길이 없어 끙끙댔던 기억이 있다. 당최 갈 길이 생각나지 않아 동네를 3시간 동안 정처없이 헤맸던 적이 있다.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잡념 가득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발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걸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질 때쯤이었는데, 이군은 내게 ‘가여워라’ 라는 말을 했었다. 그날의 모든 것이 기억난다. 집 앞 수영장의 벤치에 앉아, 보라색으로 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여름날 선바람은 얄팍한 천에 감싸진 피부를 춥게 만들었지만 그말을 듣고 머리 속에서 따뜻한 뭔가가 천천히 번져나갔었다. 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군은 그렇게 말을 했었다. 다른 누가 들으면 그것이 동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내겐 이해였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누가 알아봐준 느낌. 동굴 속에 불을 비춰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군은… 음, 아마 기억도 못할 것이다. 워낙 오래된 일이고, 지나가듯 한 말이었을 테니까. 나중에 안 얘기지만, 이군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같은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한때 그랬으니까, 더욱이 이해를 해줄 수 있던 것이었다고. 이군도 어렸고, 나도 그랬다.

내가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군 덕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으나, 분명 이군 덕이다. 이군과 난 관심사가 꽤나 비슷했고 원하는 것이 겹쳐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우린 요리, 글, 음악,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군이 좋다던 음악은 들어봤고, 이군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책도 읽었다. 꽤 낭만적이었다. 하굣길에 강을 지나는 전철의 창문을 내다보며 이군과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라는 것은 무의미 했었다. 항상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린 어쩔 땐 철저히 단순히 이용가치에 의한 사이였고, 그 거리감이 어쩔 땐 조금 씁쓸했으나 이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이군은 아주 오랜만에 얘기해도 그대로고, 날 있는 그대로 한결같이 봐주는 사람이다. 기다려도 되지 않는, 긴 기다림에 있어 전혀 무관한 사람. 사실 이군이라면 기꺼이 기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있어 이군을 편하게 한다. 울어도 웃어도 화내도, 시간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도 언제든 한결같으니. 이군은 나를 제일 모르는 사람 중 나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자, 나의 온갖 치부와 바닥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지금 내 열아홉 인생에 진정한 낭만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다면 이때였을 것이다. 내 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걷는 사람이다. 이군과 나는 여전히 친구고, 혹여나 이제 다시는 소식을 듣지 못한다 하여도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서 뭘하든, 이군만큼은 꼭 잘됐으면 좋겠다.

오늘의 추천곡: 그럴걸-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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