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싱가폴은 365일 덥지만 난 워낙 추위를 잘 타서 싱가폴의 날씨가 퍽 몸에 맞았는데, 요 근래는 그런 내게도 녹아 흐를 것 같이 더웠다. 그렇지만 8월에 접어들며 저녁에는 조금 시원한 바람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도 정말로 (개학이 내일인지라) 절절히 와닿고, 나도 많이 자랐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가 있다. 생명 하나하나가 뜨겁게 불타고 모든 에너지가 불빛마냥 휘몰아치는 여름은 이제 조금 식었다. 그 불꽃들은 점차 사그라지고, 차분해져서 더욱 견고한 무언가로 거듭난다. 사실 이번 방학은 정말 재미 있게 보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이든 (좋은 쪽이로든 나쁜 쪽이로든…) 나름의 성장을 한 것 같다. 이제 두 달이 있으면 정말로 난 성인이 되는데 그간 내가 이런 어른이 되어도 되는 걸까- 하며 초조해 했다면 지금은 이대로 주욱 나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정비의 의미로 나에 대한 몇 가지를 끄적여 볼까 한다.

1. 난 버스 타는 것을 꽤나 좋아해서 전철과 버스 중 고르라면 무조건 후자다. 난 특히나 버스에서의 창가 자리를 좋아한다. 그것도 느즈막한 오후에 여유로이 음악을 들으며 가는 길이라면 더더욱.

2. 늦은 밤에 배에 배게 하나를 깔고 엎드려 누워 음악을 들으며 쓰는 글보다 더 잘 써질 때는 없다. 가끔은 소리에 심취해 글 쓰는 것조차 잊고 눈을 감아버릴 때도 있지만.

3. 난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 있으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이다. 일주일 넘게 혼자 있어도 끄덕없다.

4. 어렸을 적에 엄마가 보름달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해서 보름달이 보일 때마다 두 손 모아 소원을 빌곤 했는데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도 이따금 소원을 빈다.

5. 첫인상이 유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인데, 그 평은 얼마 안 지나 (많이) 바뀌곤 한다.

6. 난 꿈을 조금 다이나믹하게 꾸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꿈, 도망치는 꿈, 이렇게 단편적인 내용이라면 난 수녀원에 갖혀 그 중에 스파이가 되어 탈출하는 꿈이라든지 독일군이 부활해 나라를 습격해 폐허가 된 도시를 누비는 꿈이라든지 (둘 다 실제로 꾼 꿈들이다) 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영화 뺨치는 꿈을 자주 꾼다. 꿈도 작가빨 받는 걸까, 라고 누군가 말했다.

7. 어딘가에서 사오는 군것질거리는 무조건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렸다 (화장을 지우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등등) 최상의 편한 상태에서 먹어야 한다.

8. 생 굴을 못 먹는다. 곱창도. 둘 다 먹고 크게 탈이 난 적이 있다. 뭐랄까, 맛보다는 사실 그 기억 때문에 못 먹는 것 같기도.

9. 난 내 인생에 후회 한 점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건 그 이후에 자기 합리화를 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나가고 나서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버리니 안타까워할 틈이 없다. 실제로 지나간 일을 붙들고 있지 않는다. 나도 사람이니 ‘아, 이건 이럴걸’, ‘이랬어야 했어’ 라고 아예 안 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때의 내가 최선의 선택을 했었다고 생각하니 괜찮다. 이 방법은 꽤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10. 행동력이 뛰어나다- 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주로 내가 누군가를 짝사랑할 때 듣는 소리인데, 누군가에게 마음을 못 전해서 답답한 느낌은 질색이다. 하고 싶은 말은 하는 편이라서 그렇다. 안 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더 싫은 느낌은 없다. 친구들은 이걸 대단하다고 하는데, 별로 부러워 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11. 단 걸 정말 좋아한다. 오늘만 해도 작은 하겐다즈 바만 3개 먹은 것 같다.

12. 아날로그 시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문자보다는 연필 꾹꾹 눌러 쓴 글이 더욱 멋지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그런 것을 대체할 낭만이 별로 없지 않나 싶다.

13. 에세이 쓰는 건 꽤 재미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공식 넣어서 푸는 문제 같은 건 정말 싫다. 그건 이해가 가거나 안 가거나 둘 중에 하나니까. 주로 난 후자라서 그럴지도. 다시 태어나도 이과는 정말 못할 것 같다.

14. 난 만족도가 낮은 사람이라서 아침 산책을 하다 맡아지는 이불 빨래 냄새에도 그날 하루 기분이 쭉 좋아질 수 있다.

15. 과거의 일들을 제 3인칭으로 상상할 때가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데 썩 맞는 말 같다.

16. 본업으로 작가는 못할지도.

17.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때마다 다르니까. 난 먹는 걸 좋아해서 생 굴이나 곱창 빼고는 다 먹는다. 지금 먹고 싶은 건 닭강정.

18. 우리 가족은 금요일 밤마다 모여서 영화를 본다. (안 볼 때도 있다) 난 주로 그때 먹을 간식을 사오는 역할이다.

19. 난 일본 작가가 쓴 책을 좋아한다. 일본 작가 특유의 잔잔하고 간결한 필체가 좋아서 자주 찾는 편이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20. 마찬가지로 일본 영화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배우는 우에노 주리. 영화는 다양하게 보는 편인데, 유머코드가 확실한 영화도, 감정이 절절하게 흐르는 영화도, 시종일관 큰 변화 없이 잔잔한 영화도 좋다.

21. 뮤지컬을 좋아해서 그쪽으로 쓴 돈만 600불이 넘는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 싱가폴에서 한 오페라의 유령 중 팬텀 역 배우의 개인 공연에도 갔었다. 당시 뮤지컬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던 선생님 덕분에 캐스트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

22. 언젠가는 슬로우 댄스를 춰보고 싶다.

23. 편지를 쓰는 것도, 받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추천 곡: 잔나비-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생각해보니까 예전에는 클래식 위주로 추천을 했었는데 요즘은 듣는 게 달라지다 보니까 다양하게 고려하게 된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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