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있다는 것

사람에게 여유가 있다는 것은 일종의 마법 주문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있으면 생각에 제한이 없고, 행동에 언제든 브레이크를 걸 수 있거나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보통 사람들은 일에 치이거나 할 일이 많아 숨 고를 틈이 없을 때 여유가 없다고 하고 정말 할 일이 없을 정도로 무료하고 나른할 때 여유가 돈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여유의 정의는 조금 다르다. 단순히 할 일이 없거나 내 일상을 가득히 채우던 것의 부재가 느껴질 때쯤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 여유만은 여유라고 할 수 없다. 그동안 긴장감과 불안에 휩싸여 잔뜩 날이 선 마음이 서서히 풀어져야 여유다. 여유가 생긴다는 것은 한 발짝 물러서서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때, 그때가 진정으로 여유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야망차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여유롭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오늘 느즈막한 오후에 비빔 국수를 먹으면서 여유롭다, 라고 느꼈을뿐. 애초에 단순히 바쁘던 일상이 잠시 느슨해졌다고 해서 여유롭다는 건 어쩌면 궤변일지도 모른다. 그건 말 그대로 휴식일뿐, 마음을 집어삼키는 무언가가 잠시 물러났을뿐 그 무언가를 장악했다는 뜻은 아니니까. 단순히 할 일 없이 느긋하다고 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말로 바쁨이 없어졌음에 안도하여 여유가 생겼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여유가 진정 바쁠 때도 지속될 때다. 내가 돛단배라면 주위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노를 저을 수 있을 때, 그 안정감이 여유다.

난 조금씩 여유를 가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늘 난 (고3인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산책을 하며 진짜 아침 냄새가 뭔지 알았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갓 내놓은 이불의 냄새, 수영장에 물이 일렁일 때 나는 냄새, 주위에서 잔뜩 풍겨오는 풀내음. 왠지 여유가 생기면 평소에 눈에 익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령 그간 빨랫더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화분이라던지, 해가 너울거릴 때 베갯잇에 잔뜩 고인 햇빛이라던지. 조개껍질로 만든 청빛 장식이 오후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리며 울리는 소리라던가, 일기장에 어지럽게 끄적여놓은 글이나 낙서도. 그리고 이런 한가로운 오후에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모든 걸 필름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 시간. 진짜 여유는 이런 것들에 묻어나오는 것 같다. 더 이상 무서워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후회 없이 담아내는 능력.

사실 조금 속 편한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해야할 것이 없는 건 아니다. (라고 변명해 본다) 오히려 더욱 빨리 달려야 하지만 지난 몇 주는 정말 골 아픈 일을 겪었고 이제서야 잘 추스른 것이다. 이제 난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기다림에 있어 불안해 하지 않고, 손길 하나에 망설일 일 없다. 생각을 하면 바로 글로 옮겨 적을 수 있고, 가고자 하는 곳은, 발 닿는 곳이라면 언제든 주저않고 갈 수 있다. 사람이 언제나 괜찮기는 어렵지만 이런저런 일들 사이 이러한 재충전의 시간이 있어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제 갈 길 갈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보다 더 골 아프고 더욱 바쁜 일들이 가득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난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나마 지금은 여유가 있으니까.

 

Advertisements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