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미정] 원고- 꽃집

오늘의 추천곡: Tomoyuki Asakawa – Dais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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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의 한 골목에는 꽃집이 있다.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 올 사람만 찾아 올, 작고 아기자기한 꽃집. 나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곳에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해가 내리쬐는 여름 날, 아이스 바를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집으로 가던 중, 바람을 타고 온 꽃내음을 맡고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이 모든 일의 발단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필 안 먹던 오렌지 맛 아이스 바를 사고, 안 가던 길을 걸었던 건, 모두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려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는 그곳을 보았다.

꽃집 앞 나무 간판에는 알 수 없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었다. 깨끗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으로 한 여자가 보였다. 사람이 없는 골목이라 누가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면 한 번에 눈치 챌 법도 한데, 그녀는 눈을 뜨고 자고 있는 지, 가만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시골 소년인 내가 봐도 엄청난 미인이었다. 햇살이 그녀의 긴 갈색 머리카락에 넘치듯이 쏟아지고, 그녀의 긴 눈꺼풀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지 입술이 이따금 달싹거리기도 했다. 그간 무의미한 일상을 햄스터 쳇바퀴마냥 반복하고 있던 내게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난 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다. 꽃 이외는 나와 그녀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기에, 내키지도 않는 꽃을 사야만 했다. 아니, 애초에 말을 걸 수 있는 용기나 있던가? 열여덟의 인생 중, 교실에서 선을 넘어오지 말라던 양갈래 머리를 한 꼬마 여자아이 말고는 여자에게 말 걸어 본 기억이 없다. 손은 오렌지 바가 녹아 끈적끈적하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그녀가 창문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자각하고 얼굴이 머저리 같이 벌개져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말수가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창문을 열고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기만 했다.

먼저 말을 꺼낸건 그녀였다. “꽃 사러 오셨어요?”

드라마처럼 뭔가 로맨틱한 것을 기다리던 난 괜히 김이 빠졌다. 그래도 모처럼 찾아 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꽃집은 생각보다 좁았다. 꽃집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꽃이 없는 곳이 없었다. 시계 옆에도, 탁자 아래도, 심지어 벽에도 걸려 있으니. 그녀의 앞치마 주머니에도 꽃 한 줌이 꽂아져 있었다. 그래도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바닥의 나무 판자 사이로 뽀얗게 쌓인 먼지가 보였다. 앞서가던 그녀가 빙그르르 돌았다.

“학생은 꽃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느닷 없는 질문에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미인 앞에서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그때는 왠지 솔직한 답이 튀어 나왔다.

“시간,” 마른 입술을 적시고 난 대답했다. “시간이요. 꽃시계, 뭐 이런 거 말구요.”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간? 시계? 어느 쪽?”

“시간이요.”

“그건 어째서죠?”

“딱히 이유는 없는데…그냥 막 생각한거에요. 그래도 굳이 이유가 있다면…” 정말 이유가 없기에 횡설수설하다 멈췄다.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이 부담스러웠다. “꽃은 어디에나 있어요. 어렸을 때는 민들레로 화관을 만들어 놀고, 두근두근할 때는 장미로 좋아하는 반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하고,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는 수국 한 송이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그래서 꽃은 우리와 함께 늙어간다고 생각해요.”

“그런가요?”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 지 웃기만 했다. 혹 내가 말한 꽃의 정의가 바보 같았나 곱씹어 보기도 했다.

“놀랐어요,” 그녀가 말했다. “꽃은 흔히들 추억이라고 하잖아요. 학생한테서 그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사실 여기 오는 손님들에게 물어보곤 해요. 추억, 행복, 따스함… 아름답죠? 꽃은 겉보기에는 여리고 예쁘니까요.”

“그럼…그쪽은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저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잠시 고민했다. “전 꽃은 망각이라고 생각해요.”

“망각…하지만 망각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야…완전히 잊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학생…잊으면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걸요. 그게 망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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